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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풍장은 비바람에 자연적으로 시신을 소멸시키는 장례법이다. 유골을 따로 수습하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복장제나 이중 장제와 구분된다. 언제부터 풍장을 행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전염병이나 어린아이가 죽었을 경우 행해졌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는 장법이다.

풍장은 주검을 자리나 가마니 등으로 싸서 나무에 매달거나 나무로 만든 시렁 위에 놓고 자연적으로 비나 바람 등에 의하여 소멸시키는 장례법을 말한다. 이러한 장법의 이면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계나 저승으로 보내는데 보다 유리한 방법이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흔히 풍장을 두 번의 매장절차를 지내는 이중 장제나 복장제(復葬制)와 동일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연히 다르다. 이중 장제나 복장제는 장례를 두 번 치루는 방식으로 가장(假葬)으로 여겨지는 제1차 장에서 시체를 완전히 썩혀 탈육된 유골을 본장인 제2차 장으로 처리하는 장례법이다. 복장제의 첫번째 절차인 가장이 풍장과 형태가 유사하여 착각하기 쉬운데, 풍장은 사체를 자연상태에 영원히 방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풍장은 흔적이 남지 않아 관련 유적이나 유골을 발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풍장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기록에 의하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扶餘條) 에는 “여자가 질투를 하면 죽여서 시체를 남쪽 산에 가져다 버려 썩게 내버려둔다.”라고 남겨져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 기원후 3세기 무렵에 부여에서 풍장을 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질투한 여자를 징벌의 하나로 살해한 후 시신을 산에 버려두는 일이었기에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풍장은 애장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주검을 묻을 곳이 없는 빈민이나, 어린아이 혹은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서해 도서지방에서는 1970년대까지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의 주검을 짚으로 싸서 나무에 높이 매달아 두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법이다.

독널무덤

고인돌〔支石墓〕,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과 함께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중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독〔甕〕을 사용하여 주검〔屍身〕이나 뼈를 묻는 무덤양식이다. 토기의 크기나 형태로 볼 때 유아 전용의 무덤이거나 성인의 시체를 썩혀 육탈(肉脫)된 유골을 안치〔洗骨葬〕하기 위한 무덤으로 판단된다.

청동기시대의 독널은 주로 송국리식(松菊里式) 일상용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익산 석천리 유적에서 발견된 독널은 직립구연(直立口緣)에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가 새겨진 토기를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독널무덤은 전통적으로 독의 구연부를 납작한 깬돌〔割石〕이나 판돌〔板石〕로 막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독의 상부를 토기편이나 소형의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로 덮는 구조가 발견되고 있다. 후자의 예로서는 논산 마전리 6호와 22호, 익산 화산리 B1호와 B2호, 익산 무형리 지표수습 독널을 들 수 있다. 독널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구멍은 배수(排水)나 방습(防濕), 혹은 의례행위(儀禮行爲)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독널무덤은 독널의 안치방법에 따라 독을 수직으로 세우는 직치(直置)와 비스듬히 눕혀서 안치하는 사치(斜置)로 나눌 수 있다. 토기로 구연부를 막는 독널무덤은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 보는 한 모두 사치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납작한 돌로 막는 독널무덤의 안치방법은 직치와 사치가 비슷한 비율로 발견되고 있다.

독널무덤은 부여 송국리, 공주 남산리·산의리·송학리·안영리, 익산 석천리·무형리, 논산 마전리, 군산 아동리 유적 등 주로 금강 유역 일대에서 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등과 함께 발견되지만 이외에도 곡성 연화리, 거창 대야리 유적 등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껴묻거리〔副裝品〕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간헐적으로 대롱옥〔管玉〕이 발견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널무덤 (고고학사전, 2001. 12.)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금동 향로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똑같은 복제품이 있다.

토우장식 장경호

토우는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거나 주술적 의미,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의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흙뿐만 아니라 동물의 뼈나 뿔, 나무 또는 짚이나 풀로도 만들기도 하지만, 많은 수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토우라 지칭한다. 토우장식장경호는 신라시대 만들어진 목항아리(장경호)로 목과 어깨 부분을 토우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총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1973년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30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토우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 성행위를 하는 남녀,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등을 묘사하고 있다. 높이는 34센티미터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다른 한 점은 노동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계림로 30호분에서 나온 것에 비해 토우의 수가 적다. 높이는 40.5센티미터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어떤 형태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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